<김진철 기자의 에너지이야기-(2)>
뼈아픈 석유파동! 에너지 다변화 시발점
<김진철 기자의 에너지이야기-(2)>
뼈아픈 석유파동! 에너지 다변화 시발점
  • 김진철 기자
  • kjc@energytimes.kr
  • 승인 2012.12.14 20:4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나라에 다양한 1차 에너지가 공급되기 시작한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1970년부터 우리 경제를 힘들게 했던 석유파동이다. 우리 정부는 이를 계기로 경제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반드시 안정적인 에너지 확보가 필요함을 깨닫고 고민에 빠진다.

1970년대 초 메이저의 위세가 약화된 반면 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석유수출국기구)의 지위가 향상됐다. 당시 세계석유시장은 메이저와 산유국 간 협정에 의거 쌍방과점형식으로 유지됐다.

1차 석유위기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반발로 가시화됐다. 이 전쟁은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으나, 석유수출국기구는 원유의 생산을 줄이는 동시에 미국과 친미서방국가에 대한 석유수출금지를 결의한다. 그 결과 유가는 폭등했고, 세계적인 자원민족주의는 확산됐다.

당시 우리나라는 유류를 해외원조로 조달받는 상황에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해외 의존적인 국내경제구조에 큰 위협을 받은 것. 당시 무역적자는 1973년 10억 달러에서 이듬해 20억 달러로 2배가량 늘어났다.

우리 정부는 단기적으로 에너지절약 정책을 펴는 한편 장기적으로 그 동안 집중됐던 석유에서 벗어나 석탄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된다. 이때 지식경제부의 전신인 동력자원부가 신설됐다. 또 한국석유공사의 전신이 한국석유개발공사가 설립된다.

그리고 5년이 흐른 뒤 1978년 이란 회교혁명을 계기로 세계석유시장은 2차 석유위기에 직면한다. 이란 회교정부는 1972년 말 전면적인 석유수출중단을 선언했다. 당시 이란은 세계석유공급의 10%가량을 담당했으며, 하루 최대 630만 배럴을 생산하고 이준 550만 배럴을 수출했다.

세계 석유시장은 석유업체의 원유매점쟁탈전과 각국의 석유비축 확대로 국제유가가 폭등하게 이른다. 이 위기로 외채가 증가되고 물가가 상승, 고금리로 인한 이자부담 가중 등으로 일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우리 정부는 1차 석유위기를 중동특수로 넘기는데 그쳤으며, 유가파동 흡수장치를 마련하지 않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여파는 1979년 경제성장률이 6.1%로 추락하더니 1980년 유례없는 4.2%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 제동이 걸림 셈이다. 안정적인 에너지의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시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이 위기를 계기로 탈석유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1차 석유위기 이후 탈석유정책은 탄력을 받지 못했다. 1983년 시멘트업계는 석유보다 소성연료와 유연탄으로 대체했다. 또 제지·화학·섬유·식품 일반산업체에서도 유연탄 대체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가졌다.

현재 청정에너지로 손꼽히는 천연가스도 이맘때 도입을 결정하게 된다. 우리 정부는 1980년 천연가스 도입 기본방침을 결정한 뒤 LNG인수기지 건설계획 등이 구체화됐다. 천연가스 공급은 가정용연료 다원화와 대기오염문제를 경감시켰다.

석유파동을 계기로 우리의 발전전원도 중유발전과 수력발전에 의존했던 것에서 벗어나 석탄발전과 원전, 가스발전 등이 대거 도입되는 발판이 됐고, 이 발전전원들은 현재 우리 전원구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